리메이크 1화

내 이름은 ‘제로’다.
시작도, 끝도 아닌 그저 비어있는 숫자 0.
이름이 왜 ‘제로’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한국에서 흔한 이름은 절대 아닌데, 절대로 좋은 이름은 아니다.
부모는 내가 태어나고 새벽 안개처럼 사라졌다.
덕분에 이런 시궁창 같은 현실에 살고있다.
이곳의 화폐는 ‘시길σ’이다.
내 수중엔 당장 내일의 목숨값을 걱정해야 . 할 정도의 잔돈 뿐이다.
나는 헌터다.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게이트’라는 위험천만한 공간에 던져져, 이름 모를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는 소모품일 뿐.
국가 자원에 이바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
강자들은 부와 명예를 쌓고, 나 같은 약골들은 그들의 발판이 되어 부서져 간다.
사람들은 최고의 직업으로 늘상 헌터를 꼽는데, 웃기지 말라지.
그냥 말 잘듣는 군인을 양성하는 곳이다.
우리같은 약골들은 거지같이 목숨 걸고 싸워야한다.
물론 난 약해빠져서 몬스터 하나 제대로 처리할 힘조차 없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친한 친구도 잃고.
뭐, 그렇게 됐다.

“정보”

  • 제로
  • 시길 : 15,300
  • 체력 : 100%
  • 힘 : 15
  • 민첩성 : 15
  • 지능 : 35

힘이라도 높으면 몬스터들을 단 몇방에 터뜨려버릴 수 있었을 텐데.
민첩성이라도 높았다면, 상처 하나 없이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막타라도 훔쳐 먹었을 텐데.
지능 35?
비웃음만 나올 뿐.
이 세계에선 적의 약점을 꿰뚫어 볼 지능보다, 그 약점을 꿰뚫을 힘이나 피할 민첩성이 먼저다.
고작 잔머리나 굴려 버스를 탈 궁리나 하는 내 신세라니.
물론 난 이름처럼 사회성도 제로라서 사람들이랑 대화하는걸 싫어한다. 아니, 혐오한다.
다들 대가리에 똥만 차서 일상언어들을 듣기만하면 하...
사람들의 변덕과 위선에도 진절머리가 난다.
내 주제에 자존심만은 하늘을 찔러, 강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도움을 구걸하는 짓도 혐오한다.
그래,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이 낳은 또 다른 쓰레기일 뿐이라고.

“하….. 이제 이게 마지막이다.”

여긴 지금 D급 게이트 안, 이름 모를 폐허 속이다.
오늘도 나는 바위 뒤에 숨어, 다른 헌터들이 저 녹색 점액질 덩어리들과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도망쳐 숨은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결정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인거 같기도 하고
어제와 같은 풍경…. 내일도 반복될 절망….
문득, 이 모든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스몄다.
그래,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끝낼 때가 됐다.
나는 바위 뒤에서 뛰쳐나와, 폐허 전체가 울리도록 외쳤다.

“야이 새끼들아!! 다 덤벼!!”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에게 숨겨진 [광역 도발] 스킬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질러 본, 삶에 대한 반항이었다.
속 시원하다.
녹색의 물컹이는 슬라임들, 그것들과 필사적으로 싸우던 헌터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혔다.
그래, 이상하지.
너무나 이상한 행동이지.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나는 허리춤에 찬, 유일한 무기인 작은 목단검을 꺼내 들었다.
녹슬고 이가 빠진, 이게 뭐라고 마지막 순간에 한 가닥 희망을 걸게 되는 건지.
아, 이미 늦었다.
슬라임들이 떼거지로 나에게 몰려오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셋…. 여섯…. 아홉…. 그 이상. 셀 수도 없다.
휘두르는 목단검이 오늘따라 유난히 커보였다.
그래도 저 멀리서 헌터들이 나를 구하겠다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고맙다 정말.

쫩ㅡ! 쫘압ㅡ!

점액질의 슬라임들이 온몸에 달라붙는 감촉.
차갑고 끈적이며, 살갗의 모든 구멍으로 스며드는 듯한 불쾌함.
피부가 녹아내리듯 따끔거리는 고통.
이상한 끈적한 액체 같은것도 느껴진다.
시야가 온통 역겨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더럽다.
아프다.

  • 체력 : 20%

“헌터씨! 곧 구해드리겠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맙게도 슬라임들을 떼어내 주려는 모양이지만, 이미 늦었다.
헌터씨라니…. 내 이름은 제로라고.
온몸의 힘이 풀려나갔다.
이깟 슬라임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몸뚱이.
이게 무슨 헌터라고….
그렇게 나는….
죽는….

‘…. 아니, 아직…. 살고 싶어!!!!!!!!!!!!!’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던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 자신도 몰랐던 생존 본능이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그 때, 내 눈 앞에 검붉은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신규 히든 스킬 「불멸」을 획득 하였습니다!]

순간, 온 몸을 감쌌던 고통과 점액질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나는 게이트 입구, 처음 발을 디뎠던 그 차가운 돌바닥 위에 서 있었다.
옆에는 나와 함께 입장한 당황한 표정의 헌터 세 명이 나를 보고 있었다.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