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푸욱-!
“?!”
검은 양복의 남자는 중심을 잃으며 칼을 던졌다.
칼은 멀리 도망가던 남자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복부에서 피가 뿜어졌고, 뜀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이윽고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털썩-
제로는 쓰러지는 그를 보며,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49번째 죽었다는 그 남자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제로에게 잡힌 검은 양복은 제로에게서 벗어나 남자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제로도 몸을 일으켜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쫓아갔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쓰러져 있는 남자를 지나치고, 성수대교 밑으로 사라졌다.
제로는 쓰러져 피를 흘리는 남자 앞에 멈춰 섰다.
“괜찮아?!”
“컥!”
남자는,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렸다.
“틀렸어요…. 이제 그만할래요… 큭!”
제로는 남자가 호흡이라도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고개를 들어줬다.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번엔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일어난다…. 인 건가…”
남자의 혼잣말을 끝으로 발끝부터 서서히 가루가 되고 있었다.
제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는 다시 가루가 되어 소멸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꼈다. 당장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주변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제로는 한참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다가 세리아와 미미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세리아는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미는 제로를 보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제로가 검은 양복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아?”
제로는 그들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세리아
- DE(다이브 내구력, Dive Endurance / DE - 체력) : 55%
미미
- DE : 67%
딱 한 번씩 공격당한 건데 내구력은 반으로 줄었다. 세리아는 목을 스트레칭하며 제로에게 물었다.
“그 자식들 어디 갔어?”
“도망갔어. 그리고… 또 죽었어.”
미미는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세리아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세리아가 운을 뗐다.
“그놈들 엄청난 힘이었어… 근데 그 남자는 왜 여기 갇힌 거지? 저놈들한테 아무 죄도 없으면 죽을 일이 없을 텐데.”
“죄라니?”
“크로딥에 갖힌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 죄를 지은 놈들만 여기에 갇혀. 근데 죄를 짓지도 않은 일반인이 갇힌 건… 앞뒤가 안 맞아.”
세리아는 크로노 워치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 12시 40분
시간은 다시 되돌려졌다. 세리아가 칙칙한 하늘을 보고 말했다.
“아깐 밝았는데… 왜 이렇게 어두워진 거지?”
“구름이 갑자기 몰려왔나 봐.”
“크로딥에선 환경이 절대 변하지 않아!”
미미도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딥에서는 시간이 되돌리기 전부터 죽는 시간까지 날씨, 기온 모두 똑같아.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새싹 키퍼 제로는 크로딥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쓰러진 남자 쪽을 바라봤다. 아깐, 남자가 죽은 자리에서부터 메아리 흉터가 만들어졌다. 근데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제로가 물었다.
“메아리 흉터가 안 보여.”
“결국 이볼이 된 건가… 55%, 67%, 제로는 75%… 너무 애매한데…”
“이볼이 됐다는 건…”
“살고 싶다는 희망이 사라진 거야.”
제로는 생각했다. 크로딥에 다이브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고, 공명기를 통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로딥에 다이브 될 수 없다.
세리아의 말대로라면 살고 싶다는 희망이 없으면, 이볼로 변하게 된다. 이볼로 변하면 메아리 흉터가 사라지게 된다. 제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리도 살고 싶다는 희망이 없어진다면 이볼이 되는 건가?
“제로. 조심해. 어디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몰라.”
그들은 긴장 속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쾅-
성수대교 위를 달리던 승용차 한 대가 섬광과 함께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다.
크르르-
짐승의 울음소리와 기계 마찰음이 뒤섞인 듯한 기괴한 소리가 다리 밑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펑!
바로 옆 차선에 있던 또 다른 차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로와 세리아, 미미는 반사적으로 폭발 지점에 시선을 돌렸다.
일그러진 차체 위에는 마치 여러 시체에서 뜯어낸 듯한 괴상한 살점들이 기괴하게 융합되어 꿈틀거리는 몸체.
150cm 남짓한 키에 심하게 굽은 등. 양팔은 뼈와 금속 파편이 뒤엉켜 두껍고 날카로운 칼날 형태로 되어 있었다.
부풀어 오른 근육 위로는 검붉은 핏줄들이 지렁이처럼 역겹게 꿈틀거렸다.
핏물이 번진듯 시뻘건 눈동자는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찢어진 입 사이로 상어처럼 날카롭고 커다란 이빨들이 섬뜩하게 드러났다.
이볼이다.
그리고 그때, 이볼은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주변 차량들을 종잇장처럼 찢고 폭발시키며 그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들끓는 듯한 그르렁거림과 함께, 거대한 칼날 팔이 가장 가까이 있던 세리아의 앞 난간을 강타했다.
“크아아아아!”
콰직!
금속 난간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파편이 튀었다.
세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간신히 공격을 피했다.
그녀가 방금전까지 서 있던 아스팔트 바닥에는 깊고 예리한 자국이 길게 패였다.
이볼은 멈추지 않고 세리아가 있던 곳을 미친듯이 연달아 찔러댔다.
아스팔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리아는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단검을 재빨리 꺼내 들었다.
이볼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경질적으로 세리아를 째려봤다.
그리고는 바닥을 박차고 다시 돌진했다.
그녀의 복부를 노리고 있던 칼날 같은 오른팔이 재빠르게 날아들었다.
챙!
세리아는 이를 악물고 단검으로 공격을 받아쳐 공격 방향을 비틀었다.
그 찰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미미가 육탄으로 돌진했다.
퍽!
미미의 어깨에 정통으로 부딪힌 이볼은 몇 미터를 뒤로 밀려났다.
날카로운 이빨을 보이며 ‘키킥’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낸 이볼은, 양팔로 바닥을 긁으며 미미를 향해 더욱 맹렬하게 돌진했다.
예측 불가능하게 방향을 틀며 날카로운 팔로 접근하자, 미미는 정면으로 맞받아쳐 이볼의 안면을 강타했다.
이볼은 공중에서 두어 바퀴 불규칙하게 회전하더니,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다리 위에 착지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크게 웃더니, 이전보다 더 폭발적인 속도로 미미를 옆으로 튕겨내고, 그대로 세리아의 복부를 향해 공격했다.
날카로운 팔이 세리아의 옆구리를 스쳐, 옷이 찢기고 그 위는 피로 물들었다.
미미는 막으려 했지만, 강력한 힘에 밀려 다리 난간에 처박혔다.
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미미…! 세리아…!”
제로는 즉시 세리아에게 달려갔다.
세리아의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 나왔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세리아는 얼굴을 찡그리고 손으로 상처를 누르면서 제로에게 단검을 쥐어주었다.
“우선, 이 칼 받아. 이볼 시선을 최대한 분산시켜야 해. 근데… 너 왜 조율력이…?”
세리아는 자신의 바이저 홀로그램에 나타나는 제로의 조율력을 확인했다.
전투 중인데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때, 승용차 지붕 위에 앉아 있던 이볼이 스르륵 다리 위로 내려와 먹잇감을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세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이볼은 천천히 즐기듯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미가 부딪혔던 난간 쪽에서 콘크리트 파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이볼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재빠르게 이동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미미가 이볼을 속이고 이미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제로, 내가 유인할게. 이볼이 나에게 포커스 되면, 뒤를 노려! 미미는 제로가 위험해지면 엄호해줘!]
제로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난간 너머 부서진 차들 사이로 몸을 낮췄다.
세리아의 말대로 그녀와 이볼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며 기회를 노렸다.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때, 세리아가 손뼉을 여러번 치며 이볼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기다! 어디 덤벼봐!”
이볼은 즉시 세리아를 향해 미친 드싱 돌진했다.
날카로운 칼날 팔이 그녀의 심장을 노리고 뻗어 나오는 순간
“지금이야!”
제로는 엄폐물에서 뛰쳐나오며 세리아가 준 단검을 쥐고 이볼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그대로 뛰어올라 등을 정확히 찔렀다.
푸욱!
칼날이 이볼의 단단한 외피를 뚫고 들어가자 검보라색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이볼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순간, 세리아가 재빨리 다른 단검으로 이볼의 왼쪽 가슴을 찌르려했다.
하지만 이볼은 세리아를 향해 강력한 발길질을 날렸다.
쾅!
정확한 타격에 세리아는 비명과 함께 빠른 속도로 날아가 찌그러진 차체에 부딪혔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제로의 얼굴에 튄 보라색 체액을 급하게 닦아내는 순간, 미미가 이볼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 뛰쳐나왔다.
이볼은 이미 방향을 틀어 미미를 향해 다시 한번 강력한 발차기를 날렸다.
팔로 간신히 막아냈지만, 미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멀리 나가떨어져 다리 교각에 부딪혔다.
“죽어 이 새끼야!”
제로는 이볼 등에 박힌 단검을 더욱 깊숙이 비틀었다.
이볼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데로를 떨쳐내려 미친 듯이 날뛰었다.
제로는 단검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볼이 격렬하게 몸을 흔들자, 제로는 칼을 놓는 동시에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제로는 미미와 세리아의 DE를 훑어봤다.
미미는 11%, 세리아는 7%, 제로는 23%.
세 명 모두 다이브 내구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망할…”
세리아와 미미는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여기서 자신이 쓰러지면 모두 끝장이다.
하지만 제로에게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할 만한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이브 내구력 부족으로 제대로 움직이거나, 도망치는것 조차 버거웠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이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크르르…”
이볼은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제로에게 다가왔다.
그때, 제로의 머릿속엔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강. 얼어붙은 한강을 이용해서 녀석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해보자!’
제로는 굳게 다짐하고, 소리를 지르며 이볼의 주목을 잡았다.
그리고 이볼이 공격해오는 타이밍을 잡고, 성수대교 난간을 향해 달렸다.
이볼은 제로를 뒤쫓았다. 그리고는 제로가 한강 쪽으로 온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이번만 속아라!!”
푸욱-!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제로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
[「경고」 다이브 내구력(DE) 임계점 20% 도달. 신경 동기화 불안정성 증가 감지. 즉시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안전 확보 프로토콜 실행을 권고합니다. 지속적인 DE 소모는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급증합니다.]
“컥…!”
입에서는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버드의 경고음이 고통 속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제로는 자신을 꿰뚫은 이볼의 팔을 부러질 듯 꽉 붙잡고, 남은 힘을 다해 주먹으로 이볼의 얼굴을 후려 쳤다.
꽤 큰 타격음이 울렸고, 제로는 고통 속에서도 미친듯이 주먹을 날렸다.
두 사람은 엉겨 붙은 채 얼어붙은 한강 수면 위로 추락했다.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제로는 운 좋게 이볼 위로 떨어져, 치명적인 충격은 피했지만, 복부의 상처는 심각했다.
그리고 얼음 파편 위에서 다시 이볼을 가격했다.
이볼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한참을 맞더니, 제로를 뿌리치고 팔을 빼낸 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젠장…! 어딜 도망가는 거야…!”
이볼의 얼굴은 제로의 피와 자신의 보라색 혈흔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로의 공격이 효과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볼은 거친 숨을 쉬고 다시 공격 태세를 갖췄다.
제로는 복부에서 쏟아지는피를 누르며, 휘청거리면서 이볼을 향해 힘겹게 걸어갔다.
풀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눈앞의 적에게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미미와 세리아를 지켜야 한다. 여기서 쓰질 수는 없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멈추라고 아우성쳤지만, 그는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쿠구궁-
하늘에선 커다란 천둥이 연속해서 울려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얼음 위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제로는 기어이 중심을 제대로 잡으며 이볼에게 나아갔다.
이볼은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두 칼날 팔을 교차시키며 앞으로 겨누었다. 타깃을 확인하고 그대로 바닥의 얼음을 박차며 돌진했다.
제로는 자신을 향해 무섭게 돌진해 오는 이볼을 보자,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움직여야 한다.
피해야 한다.
녀석을 죽여야 한다.
번쩍-
콰과과광-!
순간,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커다란 푸른 번개가 순식간에 하늘에서 떨어져 한강 위를 강타했다.
제로의 눈과 오른손 장갑에서 터져 나온 경이로운 푸른빛의 섬광이 번개와 공명하듯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빛의 중심에 있던 이볼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빛 속으로 분해되듯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이볼이 사라진 자리에는 커다란 천둥소리 같은 것이 크게 울려댔다.
하늘에선 번개와 천둥이 연속적으로 쳤다.
“뭐…. 뭐야…”
털썩-
제로
DE : 3%
조율력 : 380,000 (+379,970)
[!!! 최종 임계 경고 !!! 다이브 내구력(DE) 5% 미만! 의식 연결(Noetic Link) 완전성 치명적 손상! 유지 불가능!…]
제로는 힘없이 쓰러져 의식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다급한 경고음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하늘에선 하얀 눈이 아름답게 퍼지며, 펑펑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