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도대체 이게 뭐야..”
남자의 흔적은 완벽히 사라졌다. 제로는 찬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가루들을 바라만 봤다.
고개를 푹 숙이곤, 제로 쪽으로 다가오는 세리아의 얼굴엔 숙연함이 드렸다.
“아무래도 ‘사건의 굴레¹⁸’에 갇힌 거 같아.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이볼이 될 확률이 높아. 조금만 더 갔으면 됐는데.. 이 사람이 어디서 온 건지 알아내야 해. 미미를 따라가자”
『 ¹⁸ : 사건의 굴레, Cycle of Events - 크로노 딥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정보 오류 중 하나이다. 사건이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똑같이 반복된다. 루프 내의 존재들(생명체 또는 이볼)은 매번 반복되는 사건에 갖혀 극심한 정신적 피로와 현실 감각 상실을 유발하게 된다. 』
세리아는 달려가고 있는 미미 쪽으로 뛰었다. 제로도 급히 일어나 그녀를 쫓아갔다.
그때, 찢어지는 듯한 혹은 깨진 듯한 글리치 형태의 적색 광선이 제로의 뒤를 뒤따라왔다. 뒤를 돌아본 그는, 남자가 가루가 된 자리에 생긴 적색 원형을 쳐다봤다. 이것의 기준으로 선이 그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창이 제로 눈앞에 나타났다.
[미미가 ‘메아리 흉터¹⁹’를 공유했습니다]
『 ¹⁹ : 메아리 흉터, Echo Scar - '의식 소멸'(Bio-Sync 임계치 이하 하락, 강제 접속 종료, 심각한 정신 패턴 손상 등)이 발생한 지점에 남는 정보적 상흔(Informational Scar)을 의미한다. 크로노 딥스의 불안정성과 사건의 실마리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
적색 광선의 정체는 ‘메아리 흉터’였다.
제로는 세리아를 지나, 미미에게 이어진 메아리 흉터를 따라 달렸다.
메아리 흉터는 성수대교 다리 밑 한강공원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귀에선 세리아의 통신음이 퍼졌다.
치칙-
[미미, 보이는 게 있으면 바로 알려줘]
홀로그램 미미의 프로필 사진 옆에는 OK 이모티콘이 나타났다.
제로는 홀로그램 시계를 보곤, 눈을 떼지 못했다.
- 현재 시각 : 12시 30분
13시 00분이었던 시간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제로는 KEF 학교 B-5 구역에서 갑자기 장소가 뒤바뀐 곳을 생각했다.
분명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남자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로 봤을 때도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체가 걸어 다니듯 축 늘어진 몸과 시선 없는 눈은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세 번째로 봤을 때, 팔은 괴물처럼 흉측하게 변했고, 그것이 제로를 공격했다.
네 번째는 커다란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이볼. 세리아는 이것들을 이볼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거기서 누군가가 제로를 구했다.
그곳이 크로딥인지는 모르지만, 만약 크로딥이라면 제로는 공명기 없이 다이브 된 것이다.
흉터는 한강공원에 있는 뚝섬유원지역 쪽으로 이어졌다.
3번 출구와 2번 출구로 나누어진 흉터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는 미미가 보였다.
“미미, 너는 3번 출구로 가보고 나랑 제로는 2번 출구로 가보자”
제로는 세리아를 따라 2번 출구로 올라갔다.
여러 개로 된 지하철표를 찍는 입구가 그들을 가로막았고, 세리아는 자연스럽게 입구를 뛰어넘었다.
제로도 그녀와 같이 뛰어넘고 그녀를 쫓아갔다.
제로는 세리아의 말을 곱씹었다.
죽은 사람이 크로딥에 갇혔고, 구하지 않으면 이볼이 된다.
시간은 계속 바뀐다.
반복되는 시간에 갇힌 건가?
“…해”
그럼, 반복되는 시간에 갇혀서 계속 죽는 건가?
“…로!”
그걸 세리아는 분명 ‘사건의 굴레’라고 했다.
반복되는 시간에 갇힌 사람을 이볼이 되기 전에 구해야 한다.
구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로!! 안타고 뭐해!!”
“!!”
세리아는 어느새 문이 열린 지하철에 타 있었다. 제로는 세리아를 따라 지하철을 황급히 올라탔다.
제로와 세리아는 환승 후 왕십리역 6번 출구 앞에 나오자,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보였다.
메아리 흉터는 오른쪽 밑으로 향하는 길로 이어졌다.
그때, 미미에게 땀을 흘리고 있는 이모티콘이 보였다.
허리에 감긴 주황 밧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커다란 근육이 요동을 치며 달려가고 있는 미미가 나타났다.
“세리아! 저쪽이야!”
세리아와 제로는 주황 밧줄을 따라가며 미미를 뒤쫓았다.
미미가 쫓고 있는 건, 검은색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두 명. 제로와 세리아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많은 음식점을 지나, 도로로 나왔다. 제로는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을 정확히 잡아챘다.
‘만약, 시간이 반복되는 거면 죽는 장소도 반복될 수도 있잖아?’
제로는 방금 자신이 왔던 성수대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전속력으로 뛰던 제로는 급히 방향을 틀었다.
세리아에 시야에 제로가 사라지자, 한쪽 귀를 막고 거친 숨을 쉬며 말했다.
[제로! 어디 가는 거야!]
“아까 거기!”
왕십리역으로 내려가 다시 지하철을 탔다.
성수대교에 도착한 제로는 시간부터 확인했다. 13시 00분. 그가 다시 죽기까지는 15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제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올라오는 계단 바로 위에 있는 제로는, 각오를 다졌다.
‘좋아, 올라오기만 해봐!’
제로는 자신의 비서인 버드를 부르고 지도를 확인했다. 링크된 그들의 위치가 깜박였다. 제로가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세리아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야 이 멍청아! 반대쪽이야!]
“?!”
당황한 제로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고, 무작정 뛰었다.
중간지점을 지나자, 아까 칼을 맞고 쓰러졌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검은 양복의 남자들도 보였다.
제로는 숨을 거칠게 내뿜으며 전속력으로 달렸다.
“으아아!! 비켜!”
제로가 소리치며 달렸다. 그 남자는, 환한 웃음으로 제로를 반겼고, 몸을 틀어 피했다.
제로는 그의 뒤에 있는 검정양복들에게 몸통을 날렸다.
퍼억-
몸이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다 같이 뒤로 굴렀다. 곧이어 세리아와 미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검은 양복 각자에게 다가섰다.
쓰러져 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양복을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제로와 일행들을 보며 거칠게 소리쳤다.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뒷주머니에 감춰둔 칼을 꺼내 들었다. 긴장된 분위기는 모두의 얼굴에 무색하게 가라앉았다.
살아 돌아온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제로와 일행들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온몸을 떨며, 제로에게 읍소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들 아니었으면 또 죽었을 거예요.. 저들을 제발 없애주세요..!”
그 남자는, 신발은 없고 양말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미미는 힘을 잔뜩 준 근육으로 검은 양복의 남자들을 위협했다.
“거기!”
세리아가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 말을 이어갔다.
“이놈들한테 무슨 잘못을 한 거야?”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제 마지막 기억은 집 앞에서 자주 가던 카페까지 걸어가는 길에 저놈들을 만나고 이렇게 됐어요.. 처음엔 카페 앞에서 칼에 찔려 죽더니.. 그다음은 지하철 앞.. 그다음은 도로 한복판.. 피하고 도망쳐도 저는 계속 죽었어요.. 저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사람들이 제 말을 모두 무시했어요..”
그는 겁먹은 아이처럼 한없이 떨었다. 그의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미미도 등을 돌리고 몰래 눈물을 닦고 있었다.
세리아는 그의 얘기에 집중하며, 앞에 있는 검은 양복들을 경계했다.
남자는 손으로 눈물을 한번 쓱 닦고, 호소했다.
“49번.. 전 49번이나 죽었어요…. 아무리 도망치고 달아나도 항상 성수대교에서 죽었어요. 단 한 걸음도 성수대교 중간지점을 넘어선 적도 없었죠.. 그러다가 처음으로 중간을 넘었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성수대교로 왔을 때 저를 불러주고, 저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나타난 거죠.. 어떤 분들인진 모르지만 제발.. 제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주세요..”
남자는 흐느끼며 힘없이 주저앉았고,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는 49번째 죽음이라고 얘기했다. 제로는 다시 한번 절벽으로 떨어지는 남자를 회상했다.
반복되는 시간에서 반복되는 죽음. 일반적으로는 보통 사람의 정신력으로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눈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이 남자가 미쳐있는 상태가 아니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 절벽에서 떨어진 남자는 이미 미친 상태였던 건가?
세리아는 앞에 있는 자들을 경계하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허공에 조용히 수군댔다.
[미미, 내가 신호 주면 오른쪽 녀석을 공격해. 제로, 너는 그 사람 옆에 꼭 붙어있어]
미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비장한 표정으로 검은 양복 남자들을 노려봤다. 제로는 세리아의 말대로 주저앉아 있는 남자 옆으로 이동했다.
그녀가 미미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미미가 오른쪽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도 그의 움직이는 신호에 맞춰 왼쪽의 남자에게 달려갔다.
퍽!
콰아아앙ㅡㅡ!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미가 달려들었던 오른쪽 남자가 미미를 가볍게 쳐내자,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가 강하게 부딪혔다.
세리아는 휘두르는 칼을 한번 회피하고, 주먹으로 복부를 가격했다.
퍽!
그때, 미동도 하지 않던 검정 양복의 남자는 세리아의 머리를 살짝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 위의 펜스로 날아가 큰 굉음을 내며 부딪혔다.
미미와 세리아는 시멘트 먼지에 뒤덮여 모습이 가려졌다.
툭, 툭
양복을 입은 남자들은 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내며 제로에게게 다가갔다.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는 앞에 있는 광경을 보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제로 뒤로 몸을 숨겼다.
제로는 세리아와 미미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희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먼지는 도통 걷힐 생각을 안 했다. 홀로그램도 세리아와 미미를 인식하지 못했다.
제로는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옆으로 고개를 살짝 젖혀, 그 남자에게만 들리도록 속닥거렸다.
“셋을 새면 내가 녀석들을 잡을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가”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
검은 양복들은 몸을 살짝 낮추며 선글라스를 뚫고 나올 정도로 제로를 노려봤다.
“둘”
남자는 제로의 옷깃을 놓았다. 제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셋!”
제로는 그들에게 달려들어 두 손을 잡아챘고, 그대로 바닥으로 드러누웠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쿠구궁!
하늘에서 나는 천둥소리는 모든 공기를 울려댔다. 제로는 재빠르게 일어나며 그들과 거리를 뒀다.
그들은 일어나 먼지를 무심하게 털었다. 그중 한한 명은 도망가는 남자에게 시선을 두곤, 땅을 차며 달렸다.
나머지 한 명은 칼을 공중에 휘저으며 제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한번 해보자..!’
제로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곤, 앞에 있는 검은 양복을 향해 뛰어갔다.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고, 검은 양복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칼을 휘두르려 하자, 제로는 타이밍을 잰 뒤, 몸을 낮추고 대각선으로 굴렀다. 완벽히 속였다!
제로는 속도를 낮추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쫓아가는 검은 양복에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도움닫기의 힘은 강해졌고, 제로의 속력은 한계치를 넘어 점점 더 빨라졌다.
죽음에서 돌아온 남자와 검은 양복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검은 양복은 뒷주머니에서 칼을 뽑아 들었을 때, 제로는 슬라이딩 태클로 검은 양복의 종아리를 강타했다.
검은 양복의 남자가 신음하며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그때,
푸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