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2021년 1월 9일 대한민국
서울 성수 대교

“헉!.. 헉..!”

난 얼어붙은 한강 위에 있는 성수대교 위를, 최선을 다해 달려갔다.
가파르게 흩어지는 입김은 내 거친 숨소리를 보여줬다.
왼쪽 도로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차보다 빨라지고 싶었다.
검정 수트를 입은 녀석들은 뒤에서 날 쫓아오고 있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을 향해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차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감쌌고, 찢긴 패딩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온몸의 감각은 뒤에 쫓아오는 녀석들을 향했다.
추운지, 따뜻한지도 모른 채 난 계속 달렸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다.
성수대교만 넘어가면 된다.
아까 분명히 따돌렸는데.. 이번엔 달랐는데.. 기분 좋았던 희망은 나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다.
이 다리에서 몇 번이나 달려봤지만, 내 뒤에서 쫓아오는 2명 외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날 여기서 구해줬으면.. 이 지옥에서 제발 벗어나게 해줬으면..

“제발!!”

이번엔 성수대교 반 이상을 달렸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확실히 다르다. 난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대로면 정말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가에 미소는 떠나가질 않았다.
입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은 이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지금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좀만 더 힘을 내보자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번엔 내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이 있다면 제발 도와주세요..

“거기 서!!”

뒤다. 뒤에서 소리친 거다.
성수대교에서 다른 사람 말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 거 같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이제 성수대교 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성수대교. 너도 이제 끝이다. 뒤에 있는 놈들도 끝이다.
어느덧 성수대교 끝자락까지 다가왔다. 앞으로 다섯 발짝. 난 이제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난다.
끝이다. 이 개 같은 세상!

푸욱ㅡ!
“어..?”

날카롭고 차가운 물체가 내 복부를 쑤시고 들어왔다.
10cm 되는 칼. 칼은 한 번 더 비틀어졌다. 복부에서 피가 뿜어졌다.
기운이 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 채 그대로 쓰러졌다.
이번엔 달랐는데.. 이제 다 왔는데.. 성수대교 끝까지 세 발짝 남긴 채 흉기에 찔린 나는,

49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뭐?"
“사과하라고.”

제로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제로의 눈은 변함없이 날카로웠다.
베니쉬는 한참 제로를 쳐다보다, 웃음소리로 정적을 깨뜨렸다.

“아하하! 신입이군요. 제가 기분 나쁜 일을 했다면 당신께 사과드립니다.”

베니쉬는 눈웃음을 치며 제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연기다.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아서 진심이 담기지 않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제로를 야유했고, 베니쉬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니쉬 인성 최고다..”
“저 새끼 뭔데 까부는 거야? 신입이라 주목받고 싶었나.. 관종새끼”
“베니쉬님 사랑해요!!”

제로는 그들의 어떤 이야기를 하든 들리지 않았다. 사과하는 상대가 잘못됐다.

“누가 나한테 사과하래? 세리아한테 사과해”

흥분한 제로를 세리아가 말렸다.

“제로, 그만해.. 나 괜찮아. 이러면 우리만 더 피곤해져”

베니쉬는 미소를 잃지 않고 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적으로 차가운 표정으로 바뀐 그는 귓속말로 운을 뗐다.

“죽기 싫으면 꺼져 이새X야.”

제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제로가 원한건 세리아에게 미안하다는 단 한 마디였다. 그녀와 어떤 관계가 있었던, 잘못된 행동은 바로잡아야 했다.
열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세리아의 손은 제로의 팔을 잡고 말리고 있었다.
베니쉬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서 제로에게 기분 나쁜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제가 ‘그린우드’에게 볼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해요. 그럼.”

베니쉬는 뒤를 돌아 일행들과 출구로 걸어갔다.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며 출구 쪽으로 나가려던 그때, 제로는 베니쉬에게 달려들었다.

“사과하라고!!”

제로는 점프하여 두 주먹을 베니쉬를 향해 내리쳤다.

퍽-!

옆서 상황을 지켜보던 베니쉬의 동료는 한 손으로 제로의 목을 정확히 잡아챘다.
제로는 공중에 뜬 채로 그의 팔을 잡고 바둥댔다.
주변 키퍼들은 눈이 동그래지며 그 광경을 쳐다봤다.

“으읍!!”
“신입이라 그런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나 보네요. 제로. 제가 바쁜 몸이라 같이 놀아주지 못하게 됐네요.”

베니쉬의 동료는 잡고 있던 손으로 목을 더 강하게 조였다. 제로는 숨이 제대로 안 쉬어져 괴로워했다.
베니쉬는 제로에게 다가가, 제로의 눈을 정색 된 표정으로 매섭게 노려봤다.

“다음 기회에 꼭 만나요. ”

베니쉬가 놔주라는 한마디에 그의 동료가 제로를 집어 던졌다. 제로는 꽤 멀리까지 날아가 한참을 뒹굴며 멈췄다. 기침하며 호흡을 가다듬는 제로에게 미미와 세리아는 곧장 달려갔다.
베니쉬와 일행들은 출구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제로를 한심한 눈으로 힐끗 보며 속닥거렸다.
세리아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구경났어?! 제로, 괜찮아?”

옆에 있던 미미는 그들을 향해 커다란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커진 몸으로 위협했다. 커다란 몸과는 다르게 찡그린 얼굴은 귀여워서, 위협적이진 못했다.
주변 키퍼들은 각자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 제로는 한참 호흡을 가다듬고, 숨을 정상적으로 내쉬었다.
세리아는 제로의 등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는 거야!”
“저 자식. 마음에 안 들어”

미미는 몸에 힘을 줬다가 뺏다가 하며 자신의 근육을 보며 재밌어했다.
세리아는 제로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어디 다치진 않았어?”
“멀쩡해!”
“너! 다시 한번 이런 무모한 짓 했다간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 적어도 상대가 누군진 파악하고 덤비라고! 난 너 같은 놈 죽든 말든 상관 안 해! 알겠어?!”

미미는 세리아의 높은 언성에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다시 근육으로 장난쳤다.

“..알겠어”


제로와 세리아는 미미를 데리고, 빈 공명기로 향했다.

“우선 신규 팀에겐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는데 한번 확인해보자”

  • 만달리움 공식 임무 (ID: 2285)
  • 예상 RQ 보상 : 5
  • 목표 : 지정 구역 내 사건 경위 조사.
  • 좌표 : 3529, 399

제로는 세리아가 공유해 준 임무를 읽어봤지만, 특별한 점 없이 지극히 평범해보였다.

“신입 키퍼들에게 적응 시간을 주기 위해서 쉬운 임무를 배정해줬을거야. 나는 처음부터 실력이 출중해서 신입 치고 꽤나 어려운 임무를 받았지만”

제로는 미미를 쳐다보곤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세리아는 특별한 반응이 없자,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쨋든 이것부터 해보자고”

아까보다 사람이 많아져, 빈 공명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공명기는 붉은빛으로 도배되었고, 그중 몇 없는 푸른빛 공명기를 찾아 이동했다.
그들은 공명기 앞에 섰고, 세리아가 먼저 입을 뗐다.

“우리 셋은 공식적인 팀이기 때문에 ‘링크’가 돼. 우선 각자 비서한테 이야기해서 서로 링크부터 하자”

제로는 버드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제로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세리아와 미미랑 링크해 줘”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홀로그램이 세리아와 미미의 눈을 인식하고, 주황색 빛이 나는 굵은 밧줄이 허리를 감았다. 세 명은 주황색 밧줄로 동시에 연결됐다.

[링크는, 상대방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요. 거리가 멀어지면 링크는 자동으로 풀리니 주의해 주세요. 링크된 상대끼리는 자동 통신 상태가 되며, 실시간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어요. 더 도와드릴 게 있나요?]
“아니야 고마워 버드.”

그때, 제로의 눈앞에 새로운 창이 떴다.

[미미가 당신의 공명자가 되었습니다!]

  • 공명자 : 1

제로도 미미에게 하트를 눌러 공명자가 됐다. 미미가 기분이 좋은지 함박웃음을 보였다. 세리아에게도 하트를 눌러 공명자 됐다.
링크를 마치고, 세리아가 왼쪽 손목에 차고 있는 크로노 워치를 보고 말했다.

“크로노 워치의 용도는, 날짜, 시간, 날씨, 온도가 실시간으로 나타나. 그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위치나 정보, 혹은 실시간 영상을 공유하거나 녹화할 수 있어. 이건 크로딥에 반드시 필요하니까 참고해 두고. 미미는 저쪽 공명기에 들어가고 난 이쪽. 제로는 내 바로 옆에 공명기로 들어가. 좌표는 내가 공유할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세리아가 말한 대로, 미미는 두 칸 앞에 있는 공명기로 이동해 그 안으로 들어갔고, 제로는 세리아의 옆에 있는 공명기에 들어갔다.
제로가 들어간 공명기는 자동으로 문이 닫혔고, 제로의 앞은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기대고 있던 제로는, 어두운 공명기 안에서 긴장하며 좌표를 기다렸다.
세리아는 미미와 제로에게 다가가 공명기가 잘 닫혔는지 확인했다. 제로에게 다가가서 공명기를 다시 열었다.

“제로 이 멍청아! 너 반대로 기대고 있잖아!”
“아!”

제로는 거꾸로 돌아 기댔고, 그제야 공명기 밖이 잘 보였다.
세리아는 제로가 있는 공명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가 자신도 공명기를 닫고 기댔다.
서로 말이 잘 들리는지 통신 상태를 체크하고, 세리아는 자신의 비서 로즈를 불렀다.

“전송 승인해 줘. 그리고 좌표를 제로와 미미에게 공유해줘.”
[네 알겠습니다.]

세리아의 홀로그램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눈앞엔 3529, 333 이라는 좌표가 떴고, 그대로 제로와 미미의 홀로그램에 공유됐다.
세리아는 제로에게 노에틱 다이브 승인이라고 비서에게 말해야 한다고 알려줬고, 제로는 그대로 실행했다. 제로의 귀엔 세리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좌표 지정됐으면, 비서에게 다이브라고 이야기하면 돼. 그럼, 이따 보자]

제로의 홀로그램 왼쪽 아래에는 3529, 399 좌표가 적혀있는 걸 확인했다.

“다이브”
[다이브를 시작하겠습니다.]
[크로노 딥스 시스템 프로토콜 시작.]
[뉴로-컨택트 헤드레스트 결합 및 바이오-스테이시스 서포트 시작.]

공명기 안에선 두 개의 선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왔다.
선 가장자리엔 젤 패드가 있었고 그대로 제로의 관자놀이에 부착됐다. 차가운 촉감에 제로는 긴장했다.
곧이어, 찌릿한 전기가 제로의 몸에 흘러들어왔다.

[노에틱 다이브 시퀀스, 5초 전]

머릿속이 찌릿하며, 전기가 계속 머리로 흘러들어오는 거 같았다. 의자에선 약간의 꿀렁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노에딕 다이브 시작]

공명기는 빨간색으로 변했고, 엄청난 전류가 제로의 몸에 흘러들어왔다. 몸은 수많은 번개가 내리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온몸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제로는 신음할 틈도 없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러다가 자신이 곧 죽는다는 걸 순식간에 실감했다.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마비가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죽기 싫었다. 오로지 살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온몸은 죽음을 인식했다. 암흑 속에서 아무 느낌도 나지 않고,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느낌만 들었다.
난 죽은 건가..? 죽은 상태.. 프리머가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다.
세리아가 크로딥에 다이브 된다는 게 왜 기분 나쁜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그때, 멀리서 반짝거리는 빛이 보이더니, 빛은 제로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빵-! 빵!

익숙하게 들려오는 차 경적.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강렬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제로는 서서히 눈을 떴다.

‘죽은 건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다녔고,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차들이 다니는 다리 위라는 걸 직감했다.
제로는 온몸을 더듬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지 느끼기 위해서다.

“제로!”

세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리에 감싸진 주황색 밧줄이 출렁거렸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세리아와 미미가 제로에게 달려왔다. 제로는 그들을 반기며, 세리아에게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이브 된 거야. 크로딥은 죽어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만, 생존 본능이 강해야 정상적인 상태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어. 일반적인 정신력으로는 크로딥에 다이브 될 수 없어. 그렇기 때문에 미세 입자를 이용해 생존 본능을 일시적으로 극대화해 다이브 될 수 있는 거야. 아마 너도 느꼈을 거야”

세리아의 말이 맞다.
제로는 엄청난 전류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자, 순식간에 자신이 죽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살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으로 가득 찼다.
제로는 홀로그램을 봤다. 크로노 워치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엔 날짜와 시간, 장소, 온도가 적혀있었다.

  • 2020년 1월 9일 대한민국
  • 서울 성수대교 앞
  • 13시 00분
  • 영하 10도

한국? 제로는 의아했다. 순식간에 스코틀랜드에서 한국으로 이동된 것이다.
근데, 시간이 훨씬 과거로 돌아왔다.
날씨도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의 봄 날씨가 아니었다.

“날짜가 이상한..”
“저깄다!”

세리아는 소리치더니, 건너편 다리 위 인도에서 쫓기고 있는 스무 살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를 가리켰다. 남성은 찢어진 패딩을 입고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고, 그 뒤를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 두 명이 바짝 뒤쫓고 있었다.
세리아는 도로 옆 낮은 안전 펜스를 뛰어넘어,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건널 타이밍을 노렸다. 반대편 인도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미미도 곧장 펜스를 넘었고, 제로도 그들을 따라 넘었다.
차들은 멈출 기미 없이 질주했다. 반대편으로 가려면 왕복 4개의 차선을 가로질러야 했다.
세리아는 차들 사이의 빈틈을 포착하고 재빨리 도로로 뛰어들었다.
그녀를 향해 경적들이 요란하게 울렸고, 급브레이크를 밟는 타이어 마찰음이 날카롭게 들렸다.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세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개 차선을 단숨에 넘어 차선 사이의 중앙 분리대까지 달려왔다.
제로도 넘어갈 타이밍을 살폈다.

“지금이다!”

제로와 미미는 차가 오지 않는 짧은 순간을 확인하고, 동시에 중앙 분리대까지 넘어왔다.
세리아는 이미 나머지 차선을 건너 반대편 인도 위로 올라서서 쫓기던 남자를 향해 뛰고 있었다.
제로와 미미는 다시 타이밍을 살폈다. 반대편 인도를 향해 막 뛰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커다란 덤프트럭 한 대가 엄청난 속도로 제로를 향해 달려왔다.

빵—!!

고막을 찢는 듯한 경적이 울려 퍼졌고, 제로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거대한 트럭이 그를 덮치기 직전, 미미가 제로의 허리를 한 팔로 낚아채듯 들쳐 메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반대편 인도 위 안전 펜스 너머로 뛰어넘었다.
미미는 땅에 내려놓은 제로를 보고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제로는 먼저 가 앞서 달리는 세리아를 보곤, 미미와 함께 다시 그녀 쪽으로 달렸다. 거리는 꽤 벌어져 있었다.
인도 위에는 아까 그 남자가 복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세리아는 그의 옆에 서서 자신의 이마를 누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자는 이미 몸이 축 늘어져 미동도 없었다.
제로가 다가가 급히 지혈하려 하자, 세리아가 그의 손을 제지했다.
그녀는 가쁜 숨을 정리하며 낮게 말했다.

“늦었어. 망할 놈들!”

제로가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때였다. 쓰러져 있던 남자는 점점 가루가 되며 소멸하고 있었다! 한껏 흘린 피도 가루가 되고 소멸했다. 방금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리아는 고뇌에 잠겼고, 미미는 남자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세리아와 미미는 이 상황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순간, 게임인가? 가상공간인가 싶어 볼을 세게 꼬집어봐도 현실이었다.
제로는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