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대체 무슨..”
제로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속이 부글댔다.
자책했던 자신의 모습을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음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왼쪽 팔이 비치자, 그는 멈칫하며 바라봤다.
“팔… 팔이…?!”
오른쪽과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왼팔이 땅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팔은 여러 살점이 규칙 없이 괴상하게 붙어있고, 커다란 근육 사이 굵은 핏줄들이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듯 두근댔다.
‘저게 뭐야…’
흉측한 모습의 팔은 엉켜있는 신경조직들이 튀어나온 것도 한몫했다.
그때, 커다란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빠른 속도로 제로를 공격했다.
슈슉-!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로는 민첩하게 움직여 공격을 피했고, 회피한 자리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나무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뭔 힘이..”
엄청난 파괴력에 기가 찼다. 그는 해결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힘으로 버티거나 공격할 수 없으니, 절벽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 가며 절벽까지 뛰어 올라갔다.
“어디 덤벼봐! 이 괴물아!”
당당하게 뱉은 말은 초조함을 덜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제로의 심장 소리는 귓가에 울렸고, 괴물을 무너뜨릴 방법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하나.. 둘”
걸음의 패턴을 정확히 알고 있는 제로는 숫자를 세며 사정거리를 계산했다.
“셋!”
셋과 동시에 절벽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괴물의 손은 절벽 끝 쪽으로 뻗어 땅을 부쉈다.
부서진 틈 사이로 절벽에 금이 가며 그대로 절벽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괴물은 처참하게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절벽에 강하게 부딪히는 울림은 괴물의 마지막을 알렸다.
“좋았어!”
숨이 가파른 그는 좀처럼 심장 소리가 가라앉지 않았다. 아직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지나 안정을 되찾았고, 바지를 털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찢긴 교복들. 팔과 다리에 머문 상처들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었다.
..쿵! ..쿵! ..쿵!
숲속 안에선 지진이라도 난 듯 일정한 패턴으로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소리는 점차 커지고 제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그 괴물일 수 있다는 직감은 떨쳐낼 수 없었다.
‘팔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는 순간적으로 징그럽게 커다란 팔을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신경이 곤두선 그는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이윽고 나무 사이를 헤쳐나오는 발걸음 소리의 정체가 나타났다.
“그어어….”
이번엔 호리호리한 몸의 남자가 아니었다.
8m나 되는 커다란 몸집에, 온몸은 동물과 사람의 살점들을 붙인 듯 잔인한 모습이었다.
괴상한 모습의 왼팔은, 잃어버린 한 조각 퍼즐에 끼워진 것처럼 흉측하게 어우러졌다.
피로 물든 눈에 양쪽으로 찢어진 입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 그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괴물로 변한 그에겐 악취가 풍겼다.
괴물의 등장과 함께 하늘에선 번쩍거리며 번개가 쳤고 천둥소리가 뒤를 이었다.
“말도 안 돼…”
B-5 구역 앞엔 5명의 교수와 10명의 학생이 2열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데이져스 교수님과 크로딥² 가상 체험이라니 떨려!”
『 ² : 크로노 딥스, Chrono Deeps - 좌표가 있는 특정 공간을 말한다. 키퍼가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며, 일반인들에겐 여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다. 키퍼들 사이에선 크로딥이라고 불린다. 』
“말이 크로딥 체험이지 그냥 기술 좋은 VR이잖아. 난 진짜 크로딥에 가보고 싶다고”
들뜬 기분의 여학생은 맥을 끊는 남학생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2학년밖에 안 된 우리가 키퍼³도 안된 상태로 크로딥에 간다는 건, 죽으러 간다는 거나 다름없다고! 크로딥를 체험하는 것 자체도 굉장한 기회야”
“크로딥에선 괴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데 이건 전부 가짜잖아. 재미없어”
『 ³ : 키퍼, Keyper - 크로노 딥스 내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을 조사하고, 정화하고, 안정화 시키고,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고 인류의 새로운 영역을 수호하는 현대의 상징적인 직업이다. 정부 및 다양한 기관에 소속되어 여러가지 임무를 수행한다. 』
2열에 있던 남학생이 그들의 대화를 듣곤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키퍼가 돼서 괴물을 사냥하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이거로 만족해야지 뭐”
그의 말이 끝나고 정적이 흘렀다.
금색의 가르마 된 머리. 흰색 정장을 멋지게 차려입은 데이져스 교수가 손뼉을 치며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188cm 키에 우월한 외모는 학생들의 이목을 끌기엔 좋은 생김새였다.
“자 얘들아, 키퍼 역할이 뭐지?”
데이져스를 유독 좋아하는 여학생이 가장 먼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키퍼는 크로노 딥스 안에 있는 괴물들을 박살 내는 히어로에요!”
“정확히는, 크로노 딥스 안에서 나타난 다양한 사건들을 처리하여 균열을 올바르게 유지시키는 사람들이지. 그럼, 크로노 딥스는?”
그녀는 기뻐서 몸을 배배 꼬았다.
또 다른 남학생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손을 들었다.
“괴물들이 나타나는 공간입니다!”
“괴물만 나타나는건 아니고, 일반인들의 여행 장소가 되기도 하지. 크로노 딥스 가상 체험은 다들 알고 있듯, 실제로 존재하는 크로노 딥스의 공간을 바탕으로 만든 최첨단 시스템이야. 기존에 키퍼들이 크로노 딥스에 노에틱 다이브⁴ 되기 위해 들어가는 공명기⁵부터, 다이브 후의 크로노 딥스 내부까지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지”
『 ⁴ : 노에틱 다이브, Noetic Dive - 노에틱 시대에 세계적으로 수많은 천재 사상가와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상당히 복잡한 설계로 이뤄진 시스템이다. 보통 크로노 딥스에 들어가거나 전송되는 것을 말한다.
⁵ : 노에틱 공명기, Noetic Resonator - 키퍼가 크로노 딥스에 안전하게 다이브 되기 위해 필요한 보조 기계 장치이다. 』
“교수님~ 괴물은요? 볼 수 있어요? 작년에 선배들은 봤다는데”
“아쉽지만, 가상이라도 위험할 수 있어서 이번 연도부터는 그 기능이 없단다”
학생들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크로노 딥스 가상 체험의 최고 이벤트인 괴물을 직접 만나는 것이 빠졌다는 건 크로노 딥스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같다.
교수들의 목적은 키퍼가 되기 전. 학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게 아닌, 노에틱 공명기의 사용법과 노에틱 다이브에 대해 익숙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준비된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다른 의미로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데이져스를 제외한 나머지 교수들은 한쪽 귀에서 들려오는 통신에 집중하며 서로 웅성거렸다.
“교수님, B-5에 증폭이 감지됐다고 합니다. ”
“수사대에서 현장 조사를 위해 출동했다고 합니다. 학생들과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수사대는 실력 있는 키퍼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공공기관이다.
데이져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학생들은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학생들을 다시 주목시켜, 크로딥 가상 체험을 다음으로 미뤘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B-5 자리에서 모두 떠나갔다.
위로 뻗친 금발의 짧은 머리에 푸른색 눈동자만 내밀고, 나머지 얼굴을 검은색 마스크로 가린 한 남자가 B-5 구역을 맴돌았다.
“도착했어. 좌표 다시 확인해 줘. 23535, 322”
그는 허공에 대고 이야기했다.
[키히히! 맞아 느낌이 어때?]
50대의 모니터 밑에 있는 남자는, 한 모니터에서 금발남자의 상황들이 실시간으로 녹화되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진행 속도가 빨라. 그리고 하나가 아니야 한 놈 더 있다.”
[오~ 재밌군. 재밌어! 아작을 내고 오라고~]
통신이 끊겼다. 양쪽에 검은색 장갑을 착용하고 허공에 손가락을 꽂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균열이 생기며 작은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며 그는 유유히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균열된 공간이 원상 복귀됐다.
절벽 끝에 몰린 제로는 더 피할 구멍이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자신의 미래가 보였다.
이번에 절벽에서 떨어지는 건 이 괴물이 아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괴물은 재빠른 속도로 절벽 끝에 서 있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끝인가..”
그를 향해 달려오는 괴물은 순식간에 멈췄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괴물을 응시했다.
촤악-!
곧이어, 괴물의 몸은 사선으로 선이 그어졌다.
얇은 선 사이로 붉은 피가 순식간에 뿜어졌고, 그의 온몸을 적셨다.
괴물이 시야에 사라졌을 때 그토록 원했던 정상적인 사람이 보였다.
금발의 짧은 머리. 푸른 눈에 기이한 수트를 착용한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일 거로 생각했다.
피 범벅된 얼굴로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정말 감사합니..”
퍽ㅡ!
“수사대 8에코윙 3팀 KEF 대학 B-5구역. 좌표 23535, 322에 도착했지만, 상황 종료됐습니다.”
5명의 인원은 유니폼을 입고 B-5 구역을 서성였다.
검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유니폼엔 IKH(Investigation Keeper Headquarters, 수사대) 마크가 붙어있었다.
[빌어먹을 만달리움 놈들.. 어떤 놈 짓인지 샅샅이 조사해!]
포근한 햇살.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은 수면의 연장을 불러왔다.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는 수면시간은 꿀처럼 달콤했다.
철컥!
붉은 머리에 붉은 눈.
침대에서 잠에 취한 제로는 문이 열리는 소음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엔 숨길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여자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갈색의 포니테일이 찰랑거렸다.
상당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TV나 방송에서만 보던 모델의 실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프리머⁶가 널 찾아. 따라와”
『 ⁶ : 프리머 (Primer) : 만달리움 기관의 최고 책임자인 '프라임' 직속으로, 일반적인 지휘 계통에 속하지 않고 특수하고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하는 독립적인 직급이다. 』
푹신한 침대 위.
적정한 온도를 매일 맞춘 듯 알맞은 온도.
아이보리 실크 벽지에 원룸 크기만 한 방.
책상이 2개 놓여있는데, 하나는 화장대로 쓰이는 거울과 화장품들이 놓여있었고 하나는 여러 가지 서류가 널브러져 있으며 책꽂이에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낯선 곳임이 틀림없다.
그는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괴물이 뇌리에 스쳤고, 화들짝 놀라 자기 몸을 쳐다보니 찢긴 상처들 위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옷은 교복이 아닌 흰색에 세련된 검은색 줄무늬가 매력적인 트레이닝복으로 환복됐다.
그가 눈을 뜨기 전에 있던 악몽 같은 일은 꿈이 아닌 걸 금방 깨달았다.
매서운 눈매로 바라보는 그녀는 여기가 어디냐는 물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을 거란 걸 직감했다.
“여긴 어디..”
“그건 나중에. 프리머에게 가는 게 먼저야.”
제로는 전혀 궁금한 적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일자로 뻗은 복도는 중, 고등학교 교실 복도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특이한 건 각각의 방을 지날 때마다 전혀 텅 빈 벽에 홀로그램이 나타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지나가면 즉시 사라졌다.
중간에 방 하나는 홀로그램이 나타나지 않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니 여러 대의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충고하는데 나한테 관심도 두지 말고, 좋아하지도 마. 너 스무 살이니?”
“응, 스무 살”
그는 맥락 없는 말에 나이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난 스물둘. 로이원더 디크 세리아 줄여서 세리아라고 부르면 돼.”
그녀는 이름과 다르게 생김새는 어여쁜 동양인처럼 작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복도가 끝나고,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난 제로야”
“제로.. 이름이 특이하네. 웬만한 애들은 너 같은 신입들을 무시할 거야. 나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불쌍해서 말 거는 거야 알겠어?”
“..그래. 근데 여긴 대체 어디야?”
“그딴 시시한 질문은 프리머한테 가서 물어봐. 하나하나 전부 답변해 줄 시간 없어.”
2층 계단이 끝나자 3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2층과 똑같이 양옆으로 길게 복도가 늘어져 있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낼 일은 적을 거야. 여긴 그냥 휴식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돼. 네가 지금 궁금한 게 뭔진 알아. 나도 처음엔 그랬거든.”
그녀는 하얀색 셔츠 깃을 정리하고 말을 이어갔다.
“충고 하나 하자면, 프리머가 하는 이야기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냥 받아들이는 게 마음 편할 거야”
계단이 끝나자마자 왼편에 첫 번째 방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덤덤한 표정을 짓고 그를 쳐다봤다.
“그럼. 행운을 빌어”
그녀는 새침하게 돌아서서 다시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는 문고리를 돌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하나밖에 없는 방이었다.
회색으로 도배된 벽지와 바닥은 분위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책상 위엔 헝클어진 종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흩어져있었다.
책상 앞엔 검은색 머리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프리머다.
한쪽 눈에 깊게 파인 상처가 있었다.
가죽 재킷에 청바지. 가죽 부츠 끈을 꽉 조여 맨 남자는 제로를 노려봤고 말없이 고개를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로 돌렸다.
앉으라는 신호였다.
제로는 자리에 앉았고, 프리머는 책상 위에 있는 종이만 보며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기분이 어때?”
프리머의 낮고 굵은 목소리의 울림이 작은 방안으로 퍼졌다.
“제가 여기에 왜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프리머는 예상한 답변을 들은 듯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로의 말이 끝나고 한참 정적이 흘렀다.
방안에서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릴 뿐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음이 잘되어 있는지, 밖의 소리가 완전히 차단됐다.
차가운 공기에 어색함이 섞여 그것들이 방안을 지배했다.
“B-5 구역은 왜 간 거지?”
무거운 공기를 깨버린 소리는 제로에게 반가웠다.
“B-5 구역 옆에 교수처가 있어요. 그쪽에 입학신청서를 제출하려는 길에 방송을 듣고 궁금해서 가봤어요”
방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취조실로 변했다. 제로는 자신에게 죄라도 생긴 듯했다.
프리머는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하고 한쪽에 잘 쌓아 올렸다.
몸을 뒤로 눕히며 그제야 제로를 쳐다봤다.
프리머의 턱과 코밑엔 정리되지 않는 지저분한 수염들이 있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입을 열었다.
“제로, 넌 지금 죽은 상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