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좌표 떴어.”
칙칙한 어둠 속. 50대가 넘는 수많은 모니터가 방 안을 밝히고 있다.
모니터 사이에 앉아 그림자로 뒤덮인 남자는, 턱까지 오는 긴 머리의 실루엣만 보였다.
한 모니터에서 반짝이는 붉은 점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출입문 앞엔 뒤로 완전히 젖힌 의자에 누워 왼쪽 손목시계 화면에서 밝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던 노란 머리 남자가 되물었다.
“어디야?”
“23535 ,322. KEF 쪽이야.”
“수업일 거야. 시간 낭비하지 마. 그쪽은 빌어먹을 IKH 본부 놈들만큼 실력 좋은 키퍼들이 득실거리는 학교니까.”
그림자 속 남자는 미동 없던 실루엣이 미미하게 앞으로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의아하다는 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증폭이 커지고 있는데?”
노랑머리의 남자는 모니터 쪽을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홀로그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복귀나 신경 써”
“키히히… 위험한데.”
2040년 3월 15일
눈부신 봄날, 푸른 하늘 아래 중세 성채 같은 석조 건물이 위용을 뽐냈다.
가장 높은 곳의 고풍스러운 'KEF' 간판은 건물의 오랜 역사와 잘 어우러졌다.
KEF(Keeper Educational Facilities)는 오스트레일리아 인근, 비밀스럽게 자리한 세계적 국가 공인 엘리트 키퍼 양성기관이다.
그 명성처럼 고고하고 엄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거대한 정문 앞, '제로'라는 명찰을 단 소년이 간판을 올려다봤다.
183cm가 넘는 훤칠한 키, 불꽃 같은 짧은 붉은 머리와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이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아지처럼 선한 얼굴과는 대조적인 강렬한 눈빛. 그는 각 잡힌 카키색 KEF 제복에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앳된 모습 속에 숨길 수없는 특별함이 느껴졌다.
주변으로는 도시락을 든 연인들이나 수업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의 평범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제로는 잠시 그들을 본 뒤, 다시 간판을 향해 결의를 다졌다.
“KEF, 앞으로 잘 부탁해!”
낭랑한 외침과 함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을 안고 망설임 없이 정문을 들어섰다.
문 너머, 끝없이 늘어선 벚나무 길에서 분홍빛 꽃잎이 눈처럼 흩날렸다.
제로는 그 황홀한 꽃비 속으로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차게 걸어 들어갔다.
[방송반에서 알려 드립니다. 금일 15시 00분 크로노 딥스 가상 체험 학생들은 B-5 구역으로 14시 30분까지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드립니다..]
제로가 향하는 곳은 B-5 왼쪽에 있는 교무처. 입학 전 입학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방문했다.
4월 1일이 입학 날이지만, 신입생들은 입학 신청서를 미리 제출해야 한다.
“구경이나 해볼까?”
그는 방향을 바꾸고, B-5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KEF는 학교 내 지도를 봐도 어디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상당히 넓었다.
커다랗고 장엄한 건축물들은, 신의 궁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B-5구역은 간판을 보고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B-5구역 입구라고 적혀있는 간판 뒤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 길게 뻗은 흙길이 인상적이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윽!”
그때였다.
그의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더니, 바늘로 머리를 찌르듯 상당한 두통이 그를 괴롭혔다.
곧이어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그는 신음했다.
“도..도와주..”
쿵 ㅡ !
칙칙한 구름이 뒤덮은 채 노을이 진 자리엔 보랏빛이 구름을 비추고 있다.
당장에라도 어두워질 이곳엔 가로등도, 조명도 없다.
차가운 바위 위에 쓰러진 제로는 서서히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
“하.. 갑자기 무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두워진 하늘을 보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검지에 한 마디 정도로 얇게 끼워진 개인용 컴퓨터 디지팁¹을 확인해 봤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 ¹ : 디지팁, Digitips / 오늘날의 스마트폰이 검지 한마디 크기로 함축된 전자기기. 피부와 동작을 인식하여 정밀한 제스처를 입력하고 햅틱 피드백을 보낸다. 홀로그램을 띄워 각 창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으며 실시간으로 통화가 가능하다. 』
“방금 넘어지면서 다 고장났나..”
바위에 서서 몸을 털며 일어난 그의 정면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금 자신이 쓰러진 B-5구역 흙길이 아닌, 사방으로 우뚝 선 거대한 나무들이 있는 숲이었다.
“뭐..뭐야? 여기 어디야!!”
자신을 구해달라는 듯, 여러 번 소리를 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렸지만 되돌아오는 건 그의 메아리뿐이었다.
그는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파악하기 위해 위쪽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500m 앞엔 산의 정상이 보였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생각하며 걸어 올라갔을 때, 검은색 사람 형태의 실루엣이 산의 정상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기요! 이봐요! 잠깐만요!!”
정상으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소리쳤지만, 쳐다보지 않았다.
제로는 경사가 높은 정상을 오르며, 숨을 헐떡였다. 조금씩 정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위아래 옷들이 갈기갈기 찢겨있는 사람이 보였다.
한참을 멍하게 앞을 바라보던 그는 순식간의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안 돼!!”
큰 소리로 외쳤지만, 이미 제로의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사연이라도 있는 듯 찢긴 옷들과 담담히 앞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실루엣이 제로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쌀쌀한 온도가 그를 감쌌고,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떨궜다.
갑자기 뇌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살아있을 수도 있다!’
간혹 TV, 영화, 드라마에서 보면, 절벽에서 떨어져도 굵은 나무나 바위에 걸려 아등바등하며 살아있지 않은가! 그는 작은 희망을 품고 절벽 밑을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지..”
그가 위치한 절벽과 바로 앞에 커다란 산 사이엔, 해발 3,000m쯤 되는 깊은 바닥이 보였다.
자로 잰 듯 일자로 쭉 뻗은 절벽엔 굵은 나무나 튀어나온 바위 따위는 없었다.
쏴아아아-
절벽 끝엔 쏜살같이 흘러가는 강물만 보였다.
강물이 흐르는 곳으로 따라가면, 새로운 장소가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문제는 곧 자신을 들이닥칠 어두운 밤이 걱정이다.
디지팁을 다시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먹통이다.
“젠장..”
절벽 뒤쪽엔, 내려가는 길을 발견했다. 제로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있던 곳은 이제 막 봄꽃을 피워낸 봄이었지만, 이제 보니 바닥 대부분이 낙엽들로 깔려 계절이 가을이란 걸 직감했다.
부스럭
한참을 내려갔을 때, 무언가 낙엽을 밟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재빠르게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저벅, 저벅
짐승일까? 작은 토끼처럼 가벼운 발걸음 소리는 아니었다.
꽤, 무게가 있지만, 힘없이 낙엽을 밟는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길 바라며, 최대한 보폭 소리를 줄여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소리는 자신이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의 눈엔 형태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갔을 땐, 소리의 정체를 발견하고 재빨리 몸을 나무 뒤로 감췄다.
‘뭐지?!’
사람이었다.
아까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
정체 모를 남자는 힘없이 정상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찢긴 옷들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를 본 제로는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말도 안돼..”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모습이 다시 한번 기억을 스쳤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절벽에 몸을 던진 사람과 입고 있는 옷도 똑같았다.
상식적으론 죽은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수많은 생각을 멈추고 제로는 본능에 따라 그를 쫓아갔다.
그 남자는 다시 절벽 쪽으로 향했다.
“거기 멈춰!!”
제로는 아까 같은 광경을 두 번 다시 가만히 볼 수 없어,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을 꽉 붙잡고 가는 길을 막아섰다.
“그어…”
그 남자는 숨쉬기 어려운 듯, 신음하고 있었다.
코까지 기른 머리 사이로 보이는 눈은, 초점이 없었다.
신체는 빈약했으며, 깡마른 몸이 커다란 옷 틈 사이로 보였다.
제로는 그의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빈약한 몸과는 다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굴러가는 바위보다 강력했다.
안간힘을 쓰며 막아봤지만, 어느 순간 절벽까지 다다랐다.
“큭.. 제발..!! 멈추라고!!”
온 힘을 다 해봤지만, 그에겐 역부족이었다.
한 걸음만 뒤로 가면 절벽이었다.
그때,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아까와 같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앞을 바라봤다.
제로가 처음 봤던 모습이었다.
곧 절벽 밑으로 몸을 던질 것을 직감한 그는 붙잡고 있던 몸을 놓아주고, 옆으로 몸을 굴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는 절벽 밑으로 몸을 내던졌다.
“안돼!!”
제로는 소리를 지르며 절벽 밑을 바라보았다.
절벽 바위에 맞고 튕겨 나와 둔탁한 소리를 울리고 사나운 물살이 흐르는 강물로 빠지는 소리는 그의 마지막을 알렸다.
“젠장! 젠장!!”
눈앞에 죽어가는 남자를 내버려뒀다.
아니, 내버려둬야만 했다.
한참을 죄책감에 휩싸였던 그는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지켜야 한단 생각으로 다시 산 정상에서 내려갔다.
벌써 어둠으로 덮여야 할 하늘은 그가 처음 온 그대로였다.
구름만 움직이고 있었다.
부스럭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어어어…”
초점 없는 눈.
찢어진 옷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같이 얇은 다리에 빈약한 몸.
힘없이 낙엽을 밟으며 걸어오는.
아까 절벽으로 몸을 내던진 남자였다.
“대체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