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만달리움 기관, 알파 섹터 게이트 A-12에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여정이 되셨길 바랍니다.]
그들은 님버스 팟에서 내려 도심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거리를 조금 걸었다.
이곳은 최첨단 기술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건물 외벽에는 생생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거리 곳곳에는 홀로그램 정보 패널과 함께 작은 정원이나 인공 개울이 조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도심보다는 좀 더 편안하고 활동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잡화점 앞에 섰다.
겉보기엔 수백 년은 된 듯한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었지만, 입구에는 최첨단 에너지 인식 스캐너와 함께 ‘시간 여행자의 쉼터’라는 홀로그램 간판이 떠 있었다.
문에는 희미한 에너지 필드가 일렁였다.
엘라라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부는 따뜻한 조명 아래 오래된 책 냄새와 신비로운 기운, 그리고 첨단 기기의 작동음이 묘하게 뒤섞여 시간을 잊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옆에 양피지 두루마리가 놓여 있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덩치 큰 남자 점장이 그들을 반겼다.
“으하하하! 어서 오십쇼!!”
점장은 엘라라를 보더니 더욱 크게 웃었다.
“으하하!!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군. 엘라라!”
“네, 잘 지내셨죠? 마스터 휴고.”
“그럼!! 자네 덕분에 늘 즐겁지!”
“혹시 부탁드렸던 거는 들어왔나요?”
“아! 그 책… 어디 보자 보자… 잠깐 기다려봐.”
점장 휴고는 카운터 뒤편의 낡은 서랍을 뒤지더니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냈다.
표지에는 희미하게 『쿠르트 괴델 - 불완전성 정리』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책은 어떤 걸 준비해 줄까?!”
“지금은 이것부터요.. 항상 감사합니다, 휴고.”
책을 받은 엘라라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리아는 신기한 듯 진열된 옷들을 이것저것 구경했다.
제로와 미미는 작동 원리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전자기기들 앞에서 눈을 빛냈다.
세리아는 자신의 시길(σ) 잔액을 확인하곤, 마음에 드는 옷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녀의 바이저는 옷을 스캔하고, 그녀가 입었을 때의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눈앞에 보여주었다.
제로는 자신이 가진 푸른 장갑과 어울릴 만한 다른 장비나, 혹은 왼쪽 장갑에 대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미는 강화 섬유로 만들어져 근육 라인이 돋보이는 활동적인 디자인의 유니폼을 발견하곤 마음에 드는 듯 만져보았다.
어느덧 세리아와 제로 옆에 엘라라가 와 있었다.
그녀는 세리아가 보고 있던 옷 대신 다른 옷 하나를 골라 보여주었다.
“이게 좋겠군요.”
엘라라가 고른 것은 하얀색 바탕에 숲의 이끼 같은 짙은 녹색 라인이 비대칭적으로 흐르는 간결한 디자인의 점프수트였다.
소재는 만져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비단 같았지만, 빛의 각도나 착용자의 에너지 상태에 따라 표면에 미세한 에너지로 회로 패턴이 푸른색 또는 금색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절대 단순한 옷으로 보이지 않았다.
세리아는 가격표를 보고 경악했다.
8,000 시길(σ).
이거라면 웬만한 고급 장비 하나 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트 옷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의류 옵션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주변의 불안정한 에너지가 갑자기 폭발할 때, 그 충격을 흡수하거나 분산시켜 착용자를 보호합니다. (보호 등급 : C) 」
“미미씨는 이게 활동하기 편할 겁니다.”
엘라라는 미미가 눈여겨보던 것보다 한 단계 위의 모델로 보이는, 어깨와 관절 부위가 압력 감응형 충격 흡수 젤로특수 강화되고 미세한 생체 에너지 증폭 회로가 내장된 듯한 ‘타이탄 플렉스 슈트 - 가디언 모델’을 골라주었다.
가격은 4,500시길(σ).
미미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제로 씨는… 이걸 가지고 다니는 게 좋겠어요.”
엘라라가 제로에게 건넨 것은 무기나 방어구가 아닌,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수정처럼 맑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구슬이였다.
표면에는 만지면 손끝의 신경을 통해 미세한 진동과 함께 고대의 것인 듯, 이해할 수 없는 미세한 기하학적 문양이 나타났다.
엘라라가 개인적인 연구용으로 보관하던 것이라며 제로에게 내어주었다.
“아직 사용법은 저도 연구 중이지만, 당신 안의 ‘폭풍’을 다스리는 데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엘라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제로는 어리둥절했지만, 손안에서 기묘한 진동을 내는 신비로운 구슬을 소중히 받았다.
미미는 구석에 놓인, 만지면 잎사귀가 파도처럼 물결치는 신기한 식물 화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한참 관찰했다.
미미를 제외한 이들은, 듬직한 휴고가 서있는 계산대 앞으로 갔다.
“꼬맹이들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
엘라라는 잠시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듯했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죠. 이거 전부…”
“잠깐!!”
제로가 엘라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동안 세리아와 미미에게 신세 진 게 있어서 이건 내가 살게!”
미미는 저쪽에서 만지면 물결치는 식물을 톡톡 건드리며 똑같이 몸을 흔들어 따라 하고 있었다.
엘라라는 당찬 제로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옆에 있던 세리아가 배를 잡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 이게 얼만지나 알고 산다는 거야? 네 전 재산을 털어도 모자랄걸!”
“나도 돈 있어! 계산이요!”
제로가 당당하게 외쳤다.
“으하하! 훌륭한 남자군!”
휴고가 통쾌하게 웃으며 카운터 위에 놓인 반투명한 크리스탈 패드를 가리켰다.
제로가 자신의 크로노 워치를 패드 위에 올리자, 제로의 바이저 홀로그램에 [결제 금액 : 12,500시길(σ). 승인하시겠습니까?] 라는 창이 떴다.
제로는 허공에 승인 제스처를 취하자, 그의 시길(σ) 잔액이 차감…되려 했으나 [잔액 부족 : 11,200시길(σ) 부족. 거래 실패.]라는 냉정한 오류 메시지가 떴다.
“내가 이럴줄 알았다 정말...”
세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제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뒤로 휙 돌아 표정을 찡그렸다.
그 사이에 엘라라가 자신의 크로노 워치를 크리스탈 패드에 가볍게 터치했다.
‘띵’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패드 위에 [결제 완료 - 엘라라 밴스] 홀로 그램이 떠올랐다.
“미미 그만하고 가자”
세리아는 저 멀리서 식물 모양을 따라 하는 미미에게 말을 건넸다.
미미는 깜짝 놀라 재빨리 그들을 따라왔다.
도심 상점가를 조금 벗어나자, 장엄하고 돋보이는 건축물이 앞에 나타났다.
마치 고대의 거석 기념물이나 잊혀진 문명의 신전처럼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주변의 건물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시간을 거스른 듯한 위압감.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이 음각된, 마치 살아있는 듯 미세하게 빛을 조절하는 듯한 외벽은 강력한 에너지 필드로 보호받는 듯 희미하게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리아는 이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만달리움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 중 하나라는…”
“네 맞아요.”
엘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달리움 기관, 제7 연구소 생텀입니다.”
이곳은 일반인은 물론, 허가받지 않은 키퍼나 연구원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만달리움의 가장 깊은 비밀과 최첨단 기술이 잠들어 있는 곳 중 하나였다.
그들은 광활한 부지를 가로질러 육중한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복잡한 생체 및 노에틱 패턴 인증 절차를 거쳐 내부로 들어서자, 외부의 평온함과는 대조적으로 차가운 공기와 함께 미세한 기계음, 그리고 알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 흐름이 느껴졌다.
엘라라는 익숙하게 복도를 걸어, 자신의 이름 ‘엘라라 밴스 - 수석 공명학자’라고 적힌 보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그녀가 들어서자, 자동으로 부드러운 간접 조명이 켜졌다.
“드디어 왔군. 키히히”
“어이,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