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만달리움 기관, 제7연구소 생텀
“아직 시기상조야, 아벨.”
연구실 내부는 거대한 홀로그램 천체도가 희미하게 회전하며 내뿜는 푸른 빛 외에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빛을 등진 채, 창가에 선 키 큰 여성의 실루엣만이 보였다.
정갈하게 땋아 올린 포니테일이 어깨선 아래로 단정하게 떨어졌다.
그녀의 차분하고 지적인 목소리가 방 중앙, 에너지 필드 위에 떠 있는 듯한 의자에 앉은 아벨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흠.. 나는 지금이 딱 좋은 때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아벨이 빙글, 의자를 돌리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조용히 반박했다.
“아직 ‘카이로스 가든’의 공명 안정화 작업도 끝나지 않았어.”
“하하하! 엘라라, 너는 늘 최악부터 걱정한다니까.”
“그 최악을 만드는 게 누군데 그래? ‘그 녀석’ 때도 당신의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었어?”
그녀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냉기가 서렸다.
아벨의 미소가 잠시 옅어졌다.
“이번엔 달라. 내가 보증하지. 절대 그 녀석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야. 더 지켜봐야 해. 그 아이들을 그 불안정한 곳에 밀어 넣는 건 너무 위험해.”
“그러니까 우리가, 어른들이 안전하고 좋은 길을 알려줘야지.”
아벨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여성은 길게 숨을 내쉬며 모니터의 푸른 빛 속에서 미간을 좁혔다.
아벨은 그녀의 턱선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가 이내 힘없이 풀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이번 한 번 뿐이야, 아벨.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모든 책임은 당신이 져.”
IKH 본부 의무대
의료용 젤 베드의 서늘하고 부드러운 감촉 속에서 제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지막 기억은 얼어붙은 강 위, 자신을 꿰뚫었던 이볼의 팔, 그리고 하늘을 갈랐던 푸른 번개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프로파일을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 제로
- 공명자 : 113 (+52)
- 조율력: 420 (+110)
- 시길 : 1,300σ
- RQ(공명 지수) : 38 (+30)
- TRQ(팀 공명 지수) : 214 (+90)
예상대로 RQ와 TRQ는 임무 보상만큼 올라 있었다.
하지만 제로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치솟은 ‘공명자’ 와 ‘조율력’ 수치였다.
특히 조율력. 전투 중, 죽음의 문턱에서 터져나왔던 그 제어 불가능한 힘의 격렬한 감각이 아직도 온몸에 남아있는 듯했다.
동시에 늘어난 공명자 수치는 기묘한 연결감을 느끼게 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감각.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의료용 젤 베드의 냉기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혈류가 빠르게 도는 감각이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하나 처럼 강해져야 해… 하지만 단순한 힘이 아니야.’
그는 아까 보았던 하나의 전투를 떠올렸다.
슬픔 속에서도 빛나던 정교함, 그리고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한 처절함.
‘저 힘의 근원은 뭘까? 내 안의 이 힘은 또 뭐고? 그리고 이 장갑은…?’
그는 오른손의 푸른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이것이, 어쩌면 자신 안의 폭풍을 잠재우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강해져야 해. 이 힘을 이해하고 제어해서… 미미와 세리아를, 그리고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반드시 루미나리에 들도록.. ’
막연했던 목표가 조금 더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미미, 나… 강해져야겠어.”
제로가 이전과는 다른, 조금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작은 과도로 사과를 아주 예쁘고 정교하게 깎고 있던 미미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덩치와 손 덕분에 과도가 애기들 장난감처럼 보였다.
그는 제로의 결심을 읽은 듯, 걱정스러우면서도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옆 병상의 커튼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고 세리아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깜짝 놀란 미미는 잘 깎고 있던 사과가 움푹 패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세리아가 팔짱을 끼고 제로에게 따지듯 입을 열었다.
“너! 조율력이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크로딥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상승하는거야? 내 바이저가 고장 난 줄 알았는데 점검 결과 이상 없다잖아!”
“나야 모르지~”
제로는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세리아는 정말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미미는 음푹 파인 부분을 이용해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 보기 시작했다.
그때, 커튼이 소리 없이 스르륵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섰다.
“조율력이 상승하는 경우... 가끔 있어요. 아주 드물지만요.”
아주 차분하고 지적인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170cm 후반의 큰 키에, 미세한 광택이 도는 정장을 단정하게 입고 있었다.
옅은 라벤더 혹은 오래된 서고의 같은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고, 지적인 분위기의 얇은 테 안경은 그녀의 표정을 읽기 어렵게 만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땋아 올려 포니테일로 묶여 있었다.
소리 소문 없는 그녀의 등장에 제로와 세리아, 미미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미는 이번에 깎던 사과를 떨어뜨려 버렸다.
“누구시죠?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데… 본부에서 오셨어요?”
세리아가 경계심을 담아 날카롭게 물었다.
그녀는 세리아의 반응에도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 안녕하세요. 만달리움 소속 이론 공명학자(Noeticist) 엘라라 밴스입니다.”
‘만달리움 소속 공명학자?’
세리아는 그 말에 경계심을 풀고 내심 안심했다.
그녀는 엘라라의 프로파일을 빠르게 스캔했다.
- 엘라라 밴스
- 공명자 : 78,450
- 조율력 : 23,385
- RQ : 5,593
엄청난 수치들. 동시에 동경의 눈빛이 스쳤다.
엘라라는 예의 바르게 선 채로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근데 어쩐 일로 저희 병실에…?”
세리아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세 분을 만달리움 본원으로 안전히 이송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원래 아벨이 오기로 했는데,급한 용무가 생겨 제가 대신 오게 됐습니다.”
“아!”
세리아는 그제야 이곳이 만달리움 의무실이 아니라, IKH 본부 의무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IKH 본부로 직접 소환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경우, 상급자 등이 보호자처럼 직접 와서 이송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들은 간단한 퇴원 수속 절차를 마시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본부 건물을 나서자 펼쳐진 미래형 도심의 풍경이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제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건물들은 살아있는 산호처럼 유기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표면의 바이오 패널은 하늘색과 에메랄드 빛으로 부드럽게 색을 바꾸며 도시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사이를 수백, 수천의 님버스 팟²⁶들이 마치 반짝이는 거미줄 처럼 보이는 길을 그리며 각기 다른 고도와 경로를 따라 물고기 떼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상의 깨끗한 거리 위로는 몸에 꼭 맞는 스마트 직물 의류를 입은 사람들이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 정보창을 보며 바쁘게 움직였다.
『 ²⁶ : 님버스 팟, Nimbus Pod - 키퍼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1~5인승 교통수단. 에테르 위브를 통해 하늘을 미끄러지듯 날아다니는 매끈하고 조용한 자율주행 캡슐이다. 중앙 AI 관제와 개별 팟의 정밀한 센서 및 위브 제어 기술이 결합되어, 복잡한 도심 상공에서도 안전하고 효율적인 자율주행 공중 교통망을 구현한다. 』
제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님버스 팟들의 움직임이었다.
각 님버스 팟의 전방 허공에는,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투명하거나 혹은 무지갯빛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길’이 마치 리본처럼 실시간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팟이 그 위를 소리 없이 나아가면, 신기하게도 팟이 지나간 바로 뒤쪽의 길은 마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저게 바로 ‘에테르 위브’예요.”
제로와 미미가 넋을 잃고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눈치챈 엘라라가 도보를 걸으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님버스 팟이 앞에 떠다니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순간적으로 압축시키고 변화시켜서 잠시 동안만 '단단한 길'로 만드는 기술이죠. 팟이 지나가면, '단단했던 길'이 산소와 아주 얇은 물로 변해서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아요. 덕분에 저렇게 많은 팟들이 부딪히지 않고 복잡한 도심 상공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거랍니다. 일종의… 각자 전용 도로를 실시간으로 만들었다 지우며 달리는 셈이죠.”
“굉장한데?!”
제로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수많은 팟들이 자신만의 투명한 빛의 다리를 끊임없이 놓으며 하늘을 수놓는 광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엘라라는 미미와 제로의 순수한 반응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저… 공명학자는 어쩌다 되신 거에요?”
세리아는 엘라라의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며 동경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공명학자. 그들은 단순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의식과 현실의 경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며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자들.
세상의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공명’의 법칙을 읽어내고, 때로는 그것을 응용하여 기적처럼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현존하는 최고의 천재 집단.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을 그들은 이해하고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미미와 제로는 여전히 주변의 신기한 건물들과 공중에 홀로그램 악기를 연주하는 로봇 악사, 애완 로봇 위에 타고 다니는 아이, 반중력 보드를 타고 배달하는 드론 등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엘라라 밴스가 세리아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어릴 때부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았어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패턴을 읽는 것에 흥미를 느꼈죠.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녀의 대답은 겸손했지만, 눈빛에는 깊은 지성이 반짝였다.
어느덧 그들은 공중에 떠 있는 ‘게이트 I-36’ 이라고 표시된 반투명한 원형 플랫폼 형태의 님버스 팟 정류장에 도착했다.
약속된 시간에 정확히, 물방울처럼 매끈한 님버스 팟 하나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와 플랫폼 가장자리에 도킹했다.
문이 위로 부드럽게 열렸다.
[탑승 인원 4명 확인. 목적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팟 내부의 스피커에서 부드럽지만, 공식적인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엘라라가 자리에 앉으며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만달리움 기관, 알파 섹터 게이트 A-12”
[경로 확인. 통신 상태 양호. 만달리움 기관 알파 섹터 게이트 A-12로 이동합니다. 안전벨트를 확인해주십시오.]
님버스 팟은 소음 하나 없이 부드럽게 플랫폼을 떠나 상승했다.
곧이어 전방으로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에테르 위브가 뿌려지며 팟은 지정된 스카이 레인으로 진입했다.
창밖으로는 조금 전까지 그들이 걸었던 미래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수직적으로 겹겹이 쌓인 에테르 위브를 오가는 다양한 형태의 님버스 팟들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건물들의 찬란한 빛이 어우러져 숨 막힐 듯한장관을 이루었다.
세리아는 창밖 풍경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엘라라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아까… 크로딥에서 조율력이 갑자기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셨죠?”
“네, 드물지만 가능해요. 야누스 큐비트로 대표되는 핵심 정보 패턴은 크로노 딥스 내부의 크로니톤 메아리, 노에틱 에너지와..”
엘라라는 제로와 미미, 세리아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키퍼들 사이에서는 ‘리미트 브레이크’라고 부르더군요. 아주 간단히 말하면, 죽을 것 같은 위기의 순간에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자신도 모르게 정신의 안전장치를 풀어버리는 현상이죠. 평소엔 쓰지 못하던 힘이 터져 나오는 거에요.”
제로와 세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엘라라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게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아요.”
엘라라의 표정이 약간 진지해졌다.
“대부분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파괴되거나… 더 위험한 상태, 즉 ‘이볼화’로 이어지기도 하죠. 제로 씨가 무사히 돌아온 건, 그 힘을 본능적으로 제어할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그 장갑 덕분일지도 모르겠네요. 아직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입니다.”
엘라라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세리아는 그제야 어느 정도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를 돌아보고 창밖 풍경을 여전히 신기해하던 미미가 몸을 움직이다가 실수로 세리아의 머리를 엉덩이로 툭 쳤다.
세리아는 잔뜩 열받은 표정으로 한마디 던졌다.
“그만 좀 왔다 갔다 거리고 얌전히 제자리에 앉아 있어! 정말 예의 없게 말이야!”
거구 미미의 움직임에 님버스 팟이 잠깐 흔들렸다.
제로는 미미 엉덩이가 세리아 머리에 닿았던게 웃긴지 소리 내어 웃었다.
세리아는 제로에게 꿀밤을 한 대 날리곤, 다시 엘라라에게 말을 걸었다.
“키퍼가 이볼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번 임무에서 언뜻 듣기로는… 하나라는 분의 동료가 이볼이 되어 나타난 것 같더라고요”
“그럼요.”
엘라라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키퍼라고 예외는 아니에요. 그걸 ‘이볼화’ 라고 부르죠. 공명학에선 이걸 비가역적 엔트로피 임계점 돌파 현상이라고 불리는데 정보 패턴의 자가 복원…”
엘라라는 다시 한번 그들의 표정을 살피고 말을 바꾸었다.
“쉽게 말하면, 키퍼도 마찬가지로 ‘살아야 한다’는 마지막 의지마저 꺾이는 순간이 올 수 있어요. 그럼 텅 빈 의식의 자리에 크로딥의 불안정한 에너지나, 내면의 깊은 공포 같은… 원래의 ‘나’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주인이 되는 거죠. 아주 드물게는… 그 새로운 주인을 이겨내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요.”
세리아는 차분하게 설명해 주는 엘라라가 너무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저런 지성과 통찰력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님버스 팟이 속도를 줄이며 하강하기 시작했고, 안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달리움 기관, 알파 섹터 게이트 A-12에 도착했습니다. 즐거운 여정이 되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