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7년 전
생츄어리 할시온 (Sanctuary Halcyon)
수정처럼 맑은 호숫가에는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는 이국의 식물들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살랑이는 바람에서는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완벽한 풍경.
이곳은 RAS-0 등급의 안정성이 보장되어, 일반인들에게도 공개된 몇 안 되는 이상적인 크로노 딥스, 특히 신혼 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었다.
넓은 호수를 배경에 둔 하나와 민준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 날씨, 이 온도. 정말 완벽하지 않아? 고통도 슬픔도 없는 오직 평온함만이 가득한 세상. 앞으로 노에틱 다이브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모습은 이런 게 아닐까?”
햇살처럼 웃는 민준과 달리, 하나는 아름다운 풍경 너머의 공허함을 느끼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름답긴 하지만… 글쎄. 너무 완벽하니까 진짜 같지가 않아. 사실 진짜 삶의 가치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발버둥 치며 얻는 작은 성취들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음.. 우리가 완벽한 행복을 만들어서 그 안에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삶의 질이 고통스러운 현실보다 훨씬 높을거야.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 하는 주관적인 경험이니까.”
하나는 재잘거리는 새소리, 바람에 스치는 풀잎 소리, 멀리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미소 짓는 연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만들어진 행복이잖아. 우리가 직접 부딪히고, 상처받고, 극복하며 얻는 성취감이나 타인과 진실된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는 다른 거라고 생각해. ”
그녀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바로 앞에 아장아장 다가온 아이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아무리 완벽해도 만들어진 행복 속에 살고 싶진 않아.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좋은 꿈을 꾸는 거니까.”
민준이 동의하듯 끄덕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깊은 대화에 함께 빠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민준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건넨다.
“그 꿈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고 의미가 있다면? 어쩌면 우린 고통스러운 현실을 딛고 일어나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나는 이런 제약으로 가득 찬 경계 너머에 우리가 꿈꾸는 삶이 있을 것 같아!”
민준이 제약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하나는 그의 눈빛에 어린, 현실의 무게를 벗어던진 듯한 가벼움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온기, 이 대화의 파장을 붙잡아 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대답은 웃음으로 건네고, 그와 같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이 풍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왜… 도대체 왜…!”
“왜…? 헤페, 지금 프렉텔에게 반말하는 것이냐!”
하나는 너덜너덜한 채로 이성을 잃은, 지금은 민준이 아닌 이볼이 된 민준에게 다가갔다.
“민준아.. 도대체 왜 이렇..”
펑 ㅡ !
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볼이 내리친 주먹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그녀를 날려버렸다.
바닥을 구른 하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충격과 슬픔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안데르손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뭐 하는 짓이냐, 헤페! 공격 태세 없이 다가가면 어쩌자는 거냐. 저 개체는 나중이다! 우선 생존자들부터 대피시켜!”
안데르손과 미미는 재빨리 부상당한 키퍼들을 비교적 안전한 동굴 벽 쪽으로 대피시켰다.
안데르손이 노에틱 인벤토리로 IKH 본부 전용 응급 치료 키트를 여러 개 전송받아 미미에게 넘겨주자, 미미가 한 사람씩 나누어주었다.
“DE 수치 확인하고 자가 귀환 절차 밟으라는 기본 매뉴얼도 잊었나? 어리석은 짓을.. ”
안데르손은 혀를 차며 키퍼들에게 잔소리를 이어가려 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앞을 막아선 하나의 단호한 눈빛에 말을 멈췄다.
“프렉텔. 이볼과 함께 복귀시켜 주십시오. ”
“불가능하다. 당장 생존 인원들을 데리고 복귀..”
“부탁드립니다.”
하나는 간신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은 이미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안데르손은 눈앞의 하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임무 중 단 한 번도 흔들림을 보인 적 없던 그녀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저 이볼이 무엇이기에.
그녀의 눈빛은 애원에 가까웠다. 하지만 임무는 임무였다.
키퍼들을 복귀시키고 크로노 딥스 내부 상황을 최대한 빠르게 분석하여 보고해야만 했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규정상 임무 대상이 되지 않는 이볼을 함부로 데려갈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바로 복귀해야 한다.”
“프렉텔. 저 이볼은 제 옛 연인이자 동료인 송민준입니다..”
주위에 있던 키퍼들은 하나의 발언에 놀랐다.
제로를 치료하고 있었던 세리아도 깜짝 놀라서 쳐다봤다.
미미는 키트가 한 개 부족하여 안데르손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살피니, 안데르손이 키트 한개를 미미에게 넘겨줬다.
송민준. 안데르손에겐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볼을 바라보니 흐리지만 IKH 마크가 붙어 있었고, 얼굴이 꽤 더러웠지만, 외형은 송민준이 확실했다.
그는 하나와 송민준의 관계, 그리고 1년 전 이 동굴에서 벌어졌던 해결 종결 처리된 사건을 떠올렸다. 지독하게 진실을 파고들던 하나의 모습과 함께.
안데르손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자신이 욕먹을 각오로 부하를 도와줄 것인지, 명령을 이행하고 빠르게 보고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좋다. 단, 조건이 있다. 30분. 그 안에 저것이 네가 말하던 송민준이라는 증거, 아니, 인간으로서 소통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모습이라도 보인다면 네 요청을 고려해 보지. 하지만 그 후에도 저 상태 그대로라면… 규정대로 현장에서 즉시 제거한다. 알겠나?”
“…감사합니다, 프렉텔.”
하나에게는 가혹한 선고였지만, 동시에 마지막 희망이었다.
30분. 그 안에 기적을 만들어야 했다.
하나는 심호흡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세로 이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정교했다.
이볼의 주먹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육중한 팔이 궤적을 예측할 수 없이 날아들 때마다, 하나는 몸을 비틀거나 손날로 팔뚝 안쪽을 밀어내며 아슬아슬하게 충격의 중심을 비껴갔다.
그녀의 공격엔 눈물이 묻어 나왔다.
“시퀀스 사이트”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세상이 느려지고, 이볼의 다음 움직임이 수백 개의 가능성으로 그녀의 의식 속에 그려졌다.
이볼의 공격은 더 이상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폭풍 속에서 홀로 춤을 추는 무희처럼, 위험천만한 공격 사이를 우아하게 헤쳐 나갔다.
단순히 피하는 것을 넘어, 이볼의 빈틈을 정확히 노려 예리한 반격을 꽂아 넣었다.
모든 공격은 유효타였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볼을 죽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다른 키퍼들은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미미는 공격 소리에 깜짝 놀라, 의료 키트 한 개를 실수로 떨어뜨렸다.
마르디에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이게… 말이 돼? 차원이 달라..”
“말도 안 되는 싸움이다..”
타카시는 끊어진 팔의 고통 속에서도 감탄했다.
안데르손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전보다 시간이 늘었군..’
“어떻게 이볼의 공격이 한 개도 들어가지가 않는 거지?”
쥴록의 물음에 안데르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의 능력은 수많은 센스²⁵ 중 정신계에 속한다. 대상의 행동 패턴과 주변 변수를 극한까지 분석해 1초, 길게는 2초 뒤의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 센스 중 아주 희귀하지.”
『 ²⁵ : 센스, Sense - 크로노 딥스에서 키퍼들에게 발현되는 초현실적인 능력이다. 현실에서 가진 다섯 가지 감각(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나 정신 능력과 신체 능력 등이 크로노 딥스라는 특수한 환경과 키퍼의 의식이 만나 상상 이상으로 증폭되거나, 아예 새로운 형태로 변화한다. 키퍼마다 타고나거나 발현되는 센스의 종류와 강도는 모두 다르다. 이것이 각 키퍼의 개성과 전투 스타일을 결정한다. 』
신입 키퍼들의 개인 능력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저런 능력을 가진 자는 사실상 없다고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회복 중이던 제로는 너무 빠른 공방에 눈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이볼이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괴성과, 살과 뼈가 부딪히는 섬뜩한 타격음만이 귓가에 울렸다.
“제발.. 민준아.. 정신 차려 봐…!”
하나의 공격은 잠시 멈췄다.
이볼의 팔이 맹렬하게 하나를 향해 쏟아졌다.
하나는 신들린 듯 공격을 받아넘겼다.
그녀는 공격을 회피하면서 계속 외쳤다.
“기억 안 나? KEF 옥상에서 우리가 기약했던 미래! 네가 말했던 경계 너머의 세상! 그리고 여기서 약속했던 결혼..”
이볼의 움직임이 아주 미세하게, 찰나 동안 멈칫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더욱 거세진 공격이 하나를 강타했다.
퍽!
하나는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지만, 다시 자세를 잡았다.
수없이 밀리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예지 능력은 여전히 유효했다. 치명타는 모두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볼의 공격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이볼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내기 시작했다.
키퍼들은 방어를 포기한 하나를 보고 경악했다.
계속해서 공격을 받아내는 하나의 모습에 응급 키트로 치료된 마르디에가 다급하게 외쳤다.
“위험해요! 구해 줘야 해요!”
안데르손은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시간을 표시하는 크로노 워치와 하나를 번갈아 향하고 있었다.
미미는 잃어버린 의료 키트를 발견하고 기분이 상기되어 급히 쥴록에게 가져다주었다.
안데르손이 시간을 확인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방법이 먹혀야 할 텐데..”
하나는 이볼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처절하게 버텼다.
입술이 터진 곳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선을 따라 번졌다.
한때 견고했을 IKH 유니폼은 갈가리 찢겨, 흙먼지와 검붉은 얼룩으로 뒤덮인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이볼의 눈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이게 네가 말했던… 경계 너머의 꿈 꾸는 삶인 거니…?”
그 말에 이볼은 마치 발작하듯 더욱 광포하게 하나를 공격했다.
찢어진 유니폼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어깨 살점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비명 대신, 하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너의 꿈엔… 무엇이 있었던 거니… 대답해 봐…!”
그 순간, 하나의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으며 매서운 결단의 빛으로 바뀌었다.
이볼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듯 잠시 주춤했지만, 하나는 그 틈을 주지 않았다.
“패턴 브레이커”
그때였다. 하나의 몸에선 푸른색의 미세한 에너지 입자들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며 주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잔상이 어려 개로 겹쳐 보였다.
이볼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기 전에 이미 그녀는 다른 위치에 있었고, 그 움직임에는 이전의 정교함을 넘어선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 있었다.
마치 시간 자체가 그녀를 위해 흐르는 듯했다.
이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하나는 이미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콰콰콰쾅-!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엄청난 타격음이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하나는 이볼이 날아갈 틈조차 주지 않고, 그의 몸에 달라붙어 급소를 향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연속적인 충격을 가했다.
커다란 울림은 마치 동굴 자체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여기까지..! 키퍼들은 모두 복귀 준비하라!”
안데르손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나의 마지막 일격이 이볼의 가슴을 꿰뚫기 직전, 2초 뒤의 미래를 보았던 바로 그 찰나.
이볼의 일그러진 얼굴 위로, 아주 짧은 순간, KEF 시절 장난기 가득하게 웃던 송민준의 환영이 겹쳐 보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하나…’
들리지 않는 속삭임.
하나는 예정된 미래를 보면서도, 아니, 보았기에 더욱 망설임 없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하나의 입에선 영혼까지 찢겨나가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